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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도어 마니아들에게 장비 이야기는 늘 흥미로운 주제다. 나 역시 장비 개발자이기 이전에 세상의 모든 장비를 써보고 싶었던 얼리 어댑터였다. 나일론과 폴리에스터 원단도 구분하지 못하던 시절에 장비를 직접 만들어보겠다고 작심한 것은 무모한 일이긴 했지만 또한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소재는 해마다 발전하고 있고 새로운 대안들이 제시되고 있다. 소재뿐 아니라 트렌드 역시 해마다 변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필요한 장비를 직접 만드는 MYOG(Make Your Own Gear)가 새로운 트렌드로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대량 생산의 획일적인 디자인에 식상한 탓도 있으며, 스스로 직접 만드는 즐거움도 큰 탓이다.

 

개발 사상과 과학

제품 개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개발 사상이다. 내가 정의하는 개발 사상은 제품을 개발하는 전 과정에서 가져야 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일관된 방향성’이다. 기획 단계에서 설정한 목표는 개발자마다 다를 수 있다. 가격 경쟁력일 수도 있으며, 혁신기술 구현일 수도 있고, 경량화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 크기일 수도 있는데, 설정한 목표는 여러 가지가 복합될 수도 있다. 

 

개발자의 개발 목표는 모두 다르며, 또 달라야 한다. 단, 지난한 개발 과정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목표는 다를지언정 개발 사상은 분명해야 한다. 또 분명한 개발 사상은 과학적 사고방식을 전제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편견과 나만의 개발 사상을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식의 많고 적음보다 개발자에게는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칼 세이건의 말처럼 “과학은 지식 체계 그 자체라기보다는 생각하는 방식이다.” 객관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속설은 배척하고,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전부인지, 지금의 방법이 최선인지 늘 회의(懷疑)하고 질문해야 한다. 관습적인 지식과 매너리즘에 타협하지 않는 자세야말로 개발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개발자들은 고단하지만 늘 의심해야 하며,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산으로 가는 배

다른 분야의 제품도 마찬가지겠지만 아웃도어 장비의 경우 한 가지 제품으로 멀티 펑션(Multi-Function)을 구현하는 제품을 개발하는 것은 대체로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 제품 콘셉트에 집중하지 못하고, 하나의 제품에 모아둔 각각의 기능들이 오히려 제구실을 못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사례로 멀티 툴(Multi tool)을 들 수 있는데 엄밀하게 따지면 멀티 펑션이 멀티 툴의 기본 콘셉트라는 점에서 그것은 반론의 사례가 되지 못한다. 대체로 모든 소재는 가벼우면 내구성이 떨어지고, 크면 무게가 나가고, 튼튼하면 유연하지 못하다. 장비 개발자는 다양한 물성을 가진 소재 중에서 자신의 콘셉트에 맞는, 원하는 기능성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소재를 선택할 뿐이다. 

 

제품의 콘셉트가 정해졌다면 이제 배를 띄우되 배가 산으로 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개발 사상은 목적지를 향한 항로의 지침이 될 것이며, 개발 사상이 제대로 통제하는 배는 다음의 경로로 순항하게 될 것이다.

 

conception -> visualization -> prototyping -> pre-production -> mass production

 

제품 스케치의 사례 

 

보통 제품 개발 과정은 제품의 콘셉트에서 출발한다. 텐트의 예를 든다면 사용자가 누구이며, 제품을 상징적으로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는 무엇인가 등을 콘셉트로 정리한다. 콘셉트는 명료하며 간결할수록 좋은데 간단한 메모로 작성할 수도 있으며, 스케치로 정리할 수도 있다. 콘셉트가 정해지면 콘셉트를 비주얼라이징하는 단계로 진행한다. 치수가 포함된 상세 스케치일수도 있고, 3D 모델링일 수도 있다. 스케치나 모델링에는 색상과 질감을 포함한 텍스처를 적용한다. 이제 프로토타입을 제작할 단계다. 프로토타입은 제품의 유형에 따라 3D 프린팅을 이용할 수도 있으며, 봉제 제품의 경우 개발 샘플을 제작해야 한다. 모든 단계에서 제품 개발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피드백을 수집해야 하지만 프로토타입 이후의 샘플 제작 후에는 특히 제품을 직접 사용하게 될 사용자들의 피드백을 수집한다. 이러한 제품 개발의 일련의 과정에서 애초에 어떤 제품을 만들고자 하였는지 그 방향성을 잃지 않게 하는 게 바로 개발 사상의 역할이다. 

 

장비 개발자의 로망

내가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백패킹 텐트를 구입한 것은 1980년대 말이었다. 남대문의 등산 장비점에서 구입한 탑 클라이머(Top Climber)라는 국내 브랜드 제품이었는데 두랄루민으로 만든 폴대와 하이포라로 만든 레인 플라이 등 당시로서는 최고의 기술 사양이 적용된 텐트였다. 2인용이었는데 무게는 2.5kg 정도로 당시로서는 경량에 속했다. 가격은 20만 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1990년의 최저 시급이 690원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연장 근무까지 해도 한 달 급여를 훌쩍 뛰어넘는 금액이었다. 나는 이 텐트로 10년 이상을 정말이지 많은 곳들을 다녔다. 당시만 해도 국립공원 포함해 대부분의 산에서 야영이 가능했던 시절이었다. 이런 기억 때문에 텐트는 나에게 아주 특별한 장비였다. 이제는 현역이 아니지만 나는 서른 살이 넘은 이 텐트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텐트는 대부분의 아웃도어 장비 개발자들에게 궁극의 목표인데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더블월 텐트라면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의 서로 다른 원단을 사용하고, 그 외에도 알루미늄 합금 소재의 텐트 폴과 플라스틱 부자재들, 지퍼, 스트링 등 관리해야 할 원부자재의 종류도 많아서 매우 까다로운 아이템이다. 특히 사계절이 뚜렷하고, 날씨 변화가 심한 우리나라의 기후 환경을 고려해야 하므로 외적인 변수도 많다. 그중에서도 소비자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어서 텐트 개발의 부담감을 가중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의 아웃도어 시장은 세계 최고의 브랜드들이 모두 들어와 각축을 벌이고 있고, 소비자들은 세계 최고의 품질 수준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 엘 찰텐 초기 모델. 샘플을 가지고 파타고니아로 갔다.

 

나는 텐트를 개발하기 전에 원단의 속성과 봉제 공정 등을 이해하기 위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타프를 먼저 개발했다. 타프를 개발하는 과정도 쉽지는 않아서 거의 1년이 지나서야 양산을 할 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소중한 정보와 경험을 얻을 수 있었다. 가장 큰 경험은 생지를 직조하고, 염색한 후 코팅하는 원단의 생산 공정을 이해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나일론과 폴리에스터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고, 코팅의 종류와 특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가장 기초적인 지식이었지만 그저 얼리어답터였을 뿐인 나에게는 그마저도 높은 허들이었다. 1년간의 타프 개발 과정을 통해 나는 제품의 콘셉트에 맞는 좋은 원단을 식별할 수 있게 되었고, 텐트의 작업지시서에 표기해야 하는 원단의 사양을 스스로 정의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텐트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용자 입장이었고, 직접 개발을 시작했을 때는 애송이랑 별반 다르지 않았다. 텐트 스케치를 들고 몇 군데 공장을 방문해 개발 상담을 진행했지만 좋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가장 큰 어려움은 실리콘 코팅된 저 데니어의 얇은 원단을 봉제해본 경험이 풍부한 공장을 국내에서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국내의 텐트 공장을 수소문하는 한편 플랜 B 차원에서 대만의 T사로 작업의뢰서를 작성하여 보냈다. 처음 제품을 만들 때 협력 공장을 구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대부분 메이저 브랜드와 거래해오던 공장 입장에서는 처음 들어보는 브랜드와 협업하는 것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행히 T사는 긍정적인 회신을 보내왔고 샘플 개발 의뢰서에 맞게 샘플을 개발해서 보내주었다.

 


To be continue…


2021년 3월, '인사이드 아웃도어'가 공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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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아웃도어' 시리즈 보기

  • 1. 인사이드 아웃도어 01 : 아웃도어의 기원
  • 2. 인사이드 아웃도어 02 : 인사이드 아웃도어
  • 3. 인사이드 아웃도어 03 : BPL
  • 4. 인사이드 아웃도어 04 : 아웃도어 브랜드 흥망성쇠
  • 5. 인사이드 아웃도어 05 : 장비 개발
  • 6. 인사이드 아웃도어 06 : 지속가능한 아웃도어
  • 7. 인사이드 아웃도어 에필로그 : 라제건, DAC로 세계 텐트 시장을 이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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