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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산에서는 운이 아니라 준비가 생존을 만든다

백컨트리나 백패킹, 빙벽, 등반, 스키 같은 아웃도어 환경에서는 ‘사고가 나도 곧바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전제가 항상 성립하지 않습니다. 병원과 응급실이 눈앞에 있는 도시와 달리, 백컨트리 환경에서는 구조와 전문 치료까지 몇 시간에서 하루 이상 걸릴 수 있습니다.

 

이런 현실 때문에 Wilderness First Aid(야외 응급처치)는 단순한 스킬이 아니라 생존 능력입니다. 가장 무서운 순간은 ‘다친 순간’이 아닙니다. 구조를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체온은 계속 떨어지고, 통증은 심해지며, 불안은 커집니다.

 

이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상황은 빠르게 나빠집니다. Wilderness First Aid는 바로 이 시간을 버티게 만드는 기술입니다.

 

WMAI Wilderness First Responder(야외 활동가·가이드·리더급을 위한 전문 응급처치 자격)

 

2. 응급처치가 아닌, 현장 생존의 기술

도심 응급처치 교육은 보통 911 호출 후 전문 구조대가 도착하기까지의 시간을 기준으로 합니다. 하지만 백컨트리에서는 구조가 불가능할 수도 있고, 수 시간씩 기다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판단과 초기 대응 능력입니다.

 

Wilderness First Aid는 산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가정하고, 의식을 잃은 사람, 골절, 심한 출혈, 저체온증 등에 대해 현장에서 우선순위로 처리할 수 있는 지식을 전달합니다. 많은 분들이 응급처치를 ‘붕대 감는 법’ 정도로 생각하십니다.

 

하지만 야외에서는 다릅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항상 아래와 같은 질문들입니다.

  • 지금 이 장소는 안전한가
  • 환자의 의식과 호흡은 정상인가
  • 심각한 출혈이나 외상은 없는가
  • 무리한 이동이 더 위험하지는 않은가
  • 체온은 유지되고 있는가
  • 구조 요청은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가
  • 나의 상태는 어떠한가

잘못된 판단 하나가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습니다.

 

 

3. 예측 불가능한 환경이 주는 위험

백컨트리 환경의 위험은 대부분 하나의 사건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작은 변수들이 겹치며 서서히 사고로 이어집니다.

 

예상보다 빠르게 바뀌는 기상, 얼어붙은 트레일과 숨은 장애물, 고립된 상황에서의 장비 문제, 그리고 누적되는 피로. 이 네 가지 요소는 서로 영향을 주며 위험을 증폭시킵니다.

  • 갑작스러운 기상 변화는 체온 손실과 시야 저하를 만들고 판단력을 떨어뜨립니다.
  • 트레일에서의 사고는 골절이나 염좌로 이어져 이동 자체를 어렵게 만듭니다.
  • 고립된 상황에서의 장비 고장은 작은 불편을 즉각적인 생존 문제로 바꿉니다.
  • 동행자의 피로 누적은 집중력 저하와 판단 오류를 불러옵니다.

이 모든 것이 조합되어 작은 문제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Wilderness First Aid는 단순한 처치 기술뿐 아니라, 위험의 초기 신호를 읽고 예방하는 태도까지 다룹니다. 이를 통해 작은 위험을 큰 사고로 확산시키지 않고 사전에 대응할 수 있습니다.

 

4. 스스로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은 생존 확률을 높인다

야외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사고는 즉각적인 전문 치료를 받을 수 없는 상태에서 시작됩니다.

 

낙상으로 인한 골절, 강한 충격에 의한 타박상, 저체온증, 탈수, 반응 저하. 이 문제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빠르게 악화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웃도어 응급처치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하나입니다.

‘악화를 막는 것’입니다.

  • 체온 유지와 레이어링의 활용 : 모든 응급 상황의 출발점입니다. 저체온은 회복을 방해하고 출혈과 쇼크 위험을 증폭시킵니다.
  • 즉석에서 가능한 부목 만들기 : 이동 중 추가 손상을 막아줍니다. 스틱, 배낭 프레임, 스트랩, 옷은 모두 고정 장비가 될 수 있습니다.
  • 출혈 제어 : 생명을 지키는 최우선 과제입니다. 압박, 고정, 지속적인 관찰이 기본입니다.
  • 의식 상태 확인과 기도 확보 : 모든 처치보다 앞섭니다. 숨을 쉬지 못한다면 다른 모든 대응은 의미를 잃습니다.

이 네 가지 대응은 구조대가 도착하기 전까지 환자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줍니다. 그 시간은 곧, 생존 가능성입니다.

 

야외 응급처치의 목적은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문가에게 안전하게 넘겨줄 수 있을 때까지 사람을 지켜내는 것입니다.

 

5. 생존은 준비와 태도

누구나 붕대를 감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테이프를 붙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고가 나기 전부터 시작됩니다.

  • 오늘 날씨를 어떻게 해석했는가
  • 내 체력은 충분한가
  • 파트너의 상태는 어떠한가
  • 돌아갈 수 있는 선택지를 남겨두었는가

이 모든 것이 이미 응급처치의 일부입니다. 사고는 갑자기 발생하지만, 위험은 항상 신호를 보냅니다.

 

6. 장비는 나를 지켜주지 않는다

좋은 의류, 좋은 신발, 좋은 배낭, 값비싼 장비들. 우리는 장비에는 아낌없이 투자합니다. 방수 등급, 보온력, 무게, 브랜드. 수치와 스펙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준비에는 시간과 비용을 쓰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체온이 떨어질 때, 레이어링은 ‘입을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출혈이 발생했을 때, 붕대는 ‘쓸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 도구가 됩니다. 골절이 생겼을 때, 스틱과 스트랩은 ‘고정 방법을 아는 사람’이 있을 때만 부목이 됩니다.

 

배터리가 방전되면 GPS는 멈추고, 장비가 파손된다면 최신 장비는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 순간부터 남는 것은 지식과 판단력뿐입니다.

 

아는 사람이 살립니다. 준비한 사람이 버팁니다. 이를 ‘Improvisation(임기응변)’이라고 부릅니다. 제한된 장비로 최선의 의료 환경을 만드는 능력입니다.

 

7.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Wilderness First Aid를 배운다고 해서 모든 사고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준비된 사람은 사고 앞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최소한 아래 세 가지는 모든 아웃도어 활동가가 갖추어야 합니다.

  • 첫째, 기본 응급 대응 지식 : 저체온증, 출혈, 골절, 의식 저하에 대한 초기 대응 방법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 둘째, 개인용 퍼스트에이드 키트 : 붕대, 테이프, 방수 패드, 보온 시트, 장갑. 작지만 생존을 좌우하는 도구들입니다.
  • 셋째, 구조를 부를 수 있는 수단 : 위성 메신저, 비상 연락망, 위치 공유 시스템. 도움은 준비한 사람에게만 옵니다. 이 세 가지가 갖추어졌을 때 모험은 비로소 자유가 됩니다.

 

8. 더 오래 타기 위해, 먼저 배운다

저는 여전히 산을 좋아합니다. 여전히 더 깊이 들어가고 싶고, 더 좋은 순간을 기록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안전하게 돌아와야 다음에 다시 산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다음 연재에서는 Wilderness First Aid를 바탕으로 아웃도어 현장에서의 사고 대처법들을 하나씩 풀어보려 합니다. 저체온증, 골절, 의식 저하, 그리고 구조까지의 과정. 멋있게 타는 법이 아니라, 오래 타는 법에 대한 기록입니다.

 

산에 오르기 전, 저는 먼저 생존을 배웠습니다.

 

결론

산에서는 항상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준비하고 들어오는 사람과, 아무 일도 없기를 바라며 들어오는 사람입니다. Wilderness First Aid는 사고를 막아주는 마법이 아닙니다. 대신 문제가 생겼을 때 도망치지 않고 마주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는 분명합니다. 한 번쯤 응급 상황을 가정해 보고, 내 배낭 안을 다시 열어보고, 동행자와 안전에 대해 이야기해 보는 것. 그 작은 준비 하나가 언젠가 누군가의 하루를, 그리고 삶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가 다시 돌아올 수 있을 때만, 그 의미가 있습니다.

Author

임새결
  • Edi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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